“쉽게, 빠르게 읽히지 않겠다”는 소설가의 ‘독자 모독’

Loading...
Thumbnail Image

Date

2024-02-16

Journal Title

Journal ISSN

Volume Title

Publisher

한겨례

Abstract

장르 초월 16년차 구병모 콘텐츠-스킵의 시대 맞선 ‘작가주의 소설론’의 저항 “소멸할 신념이라면 신념과 함께 죽을 것”

Description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82)의 희곡 ‘관객모독’엔 뚜렷한 사건이 전개되지 않는다. 관객은 통상의 감정이입은커녕, 제 감정을 방어하고 추스르기 바빠진다. 텅 빈 무대에서 네 명의 화자들이 오직 언어로써, 뒤틀린 현대사회를 조롱하고 급기야 객석에 나앉은 방관자, 의식 없는 수동태로서의 관객을 훌닦기 때문이다. 1966년 초연 이래 뛰쳐나간 관객이 다 헤아려질까. 관객 모독은, 한트케의 의도대로, 기존의 연극에 대한 대항이었다. 냉소와 비관을 감추지 않아 왔던 작가 구병모(48)의 신작 ‘단지 소설일 뿐이네’에선 말하자면 ‘독자 모독’이 감행된다. 주인공 작가가 세계관을 표명하는 방식부터가 그러하다. 문학 출판계를 꼬집고, 결결이 낯선 한자어와 줄곧 현학적인 글말체를 대중들에게 시전한다. (작가는 웃으며 “2021년 펴낸 ‘상아의 문으로’보단 쉽게 쓰려고 했다”고 기자에게 말했으나. 14일 전화 인터뷰에서다) 이해 쉬운 ‘콘텐츠’, 영상화에 경도된 업계와 독자의 습속에 투항하지 않음으로, 지금의 문학판에 저항한다. 속된 말로 ‘읽히면 구땡, 팔리면 장땡’이라는 시장 신화에 맞서 독자들에게 “쉽게 읽히지 않겠다”는 소설론을 구병모는 피력한다. 이러한 신념과 가치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작품이 바로 이 소설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작품이 혹 실패라면, 그건 모독을 모독으로 읽지 못하는 독자의 실패요, 세태의 실패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시 ‘그날’, 이성복)는 세계의 초상이다. ‘관객모독’과 마찬가지로 ‘단지 소설일 뿐이네’에도 극적인 사건이랄 게 없다. 인물(캐릭터)도 “강렬하”지 않다. 나이 성별부터가 감감하다. “남 부러울 것 없던” 중견 작가, 그와 거래해 온 15곳가량의 출판사 중 한 곳의 담당 편집자가 길게 늘어놓는 사변이 있을 뿐이다. 소설 속 소설이라는 메타형식을 통해, 인물들의 언어는 소설 밖 소설 너머 여기 모든 편집자와 작가, 그리고 독자를 겨눈다. 데뷔 20여년 된 작가 S(에스)가 사라진다. 예정된 북콘서트에 나타나지 않자 편집자가 찾아 나선다. 이삼일 전 앞서 유명 인플루언서의 폭언이 있긴 했다. 순수한 전문 독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평가도 작가는 기억해온 모양이다. 그의 초기 장르물을 기준 삼아 “마녀는 너무 일찍 노쇠했고 지팡이는 꺾여버린 듯. 이제 놓을 때가 됐”다는 비난성 손절 내지 ”최근작 무엇을 찍먹해보아도 예전 같은 맛이 도무지 없어. 제발 돌아와” 달라는 야유성 애원, 아이의 논술에 도움되면 좋겠다며 책 사인을 요청했던 이가 남긴 에피소드까지…. 편집자는 실종 신고를 하며 떠올린다. 첫 책부터 흥행에 성공한 작가, 장르를 넘나드는 다작이면서도 “어디다 어떻게 던져놓아도 기본은 먹고 들어간다고 인식되는 저자군”. 작가의 초기 작품은 영화화도 됐다. 다만 이를 계기로 작가는 변하기 시작한 듯하다. 이후 작품의 영상화가 멈췄고, 깐깐해졌다. “글만 갖곤 못 판다고 다른 거 같이 팔아야 한다고, 저자의 얼굴과 미소와 인사할 때의 제스처 등이 책에 끼워 파는 굿즈와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편집자는 못마땅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최고는 안 돼도, 장사는 되는 작가 아닌가. 이 소설의 파동은 작가가 추구하는 ‘작품관’과 시장이 추앙하는 ‘콘텐츠 상품관’의 이격에서 발생한다. “맞춤 서비스”를 장기로 주로 “게임을 라이트하게 즐기는 초보자들이 픽”한다고 보는 편집자, 다장르 다작을 두고 “문학이 아니라 잡기에 능한 약장수가 벌여 놓은 좌판”이라고 혹평하던 일부 교수가 보기에, 작가가 새삼 풀어놓는 작가주의 소설론은 이율배반에 가깝다. 누군가는 느닷없다 할 것이다. 도대체 어떤 시대인가. 출판사는 콘텐츠개발사로 둔갑하고, 소설 대신 콘텐츠를 찾아 섭외하는 시대다. ‘영화 판권 계약’이 작품성을 대변한다. 그 영화조차도 미장센, 편집의 의도 따위는 ‘스킵’되고 줄거리 중심으로, 쇼츠로 소비되는 시대. 자기계발서가 넘치고, 소설은 그저 “OTT 플랫폼이 취사선택할 수 있는 대량 덤핑 품목 가운데 하나”가 된 시대. 작중 소설가의 말대로, 누가 감동의 동을 ‘움직인다(動)’라 했던가. 같을 동(同) 아닌가. “남들과 같은 것을 느껴야 최소한의 포만감을 얻고… 안심과 위안이” 되어 트렌드가 되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과잉의 문학판이 작가를 폭발시킨 셈이다. “장소와 사건을 도구 삼아 인물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작업에 진력”이 나 떠난 여행길, 뭍에서 종지도라는 이름의 섬으로 닿는 다리 위에서 S는 묻고 말한다. “세상 어떤 결말도 눈앞의 문장 한 줄보다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마지막으로 접해본 적이 언제였나?” “내가 쓰는 것은 단지 소설일 뿐이고, 그것은 오래전부터 도래한 세상이 말하는 힐링과 킬링이라는 요청에 응답하지 못했으며” “사색 끝에 사색이 되어 경련하는 말들 속에서 최후까지 남아 있는 미량의 빛깔을 번역하고자 시도하며 그에 실패하기를 반복함을, 소설의 유일한 가치로 삼고 싶었을 뿐이네.” 소설가가 본토에서 요망하는 글쓰기를 더는 하지 않겠다며 다리를 건너고, 그 다리 위에서 실종되고자 한다. 바로 누구도, 특히 작가가 책 앞머리에 헌사한 ‘호모 스키펜스’(스킵하는 인간을 뜻하는 조어)가 한 줄로 예술을 추궁하지 못하게, 대신 이 소설에서 오래오래 함께 길을 잃길 바라는 마음이라 하겠다. 구병모의 냉소는 폭소와 가깝다. “글을 쓸 땐 본능적으로 유머 모드가 장착되는 다른 몸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작가는 한겨레에 말한다. “소설 시 영화 연극 음악 가리지 않고 콘텐츠라 퉁치면서 재미있으면 된다고 평준화하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썼다”는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희곡 ‘관객모독’에 말미 관객에게 물을 뿌리는 대목은 없다. 그러나 연극에선 물을 뿌리는 장면으로 유명하고, 지금껏 모독의 방식은 더 지독해져 왔다. 의식 없는 방관자는 더 모독‘되어야’ 했던 것이다. 기어코 ‘자본주의 시장 문학’의 소비자들에게도 물을 뿌리는 때가 오지 않을까. 과연? 구병모 작가는 한겨레에 “자본주의에 종속된 문학 시장, 쉽게 읽히고 빠르게 소비되고 금세 잊히며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사이클이 당연한가, 누군가는 질문해야 한다”면서도 “시대가 바뀌고 소멸할 수밖에 없는 신념인가 싶은데 운명이 그렇다면 그 가치를 믿는 사람이 믿다가 죽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Keywords

Citation

Collections